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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20년 전 아들 책꽂이에 꽂아줬던 그리스 로마 신화 전집이, 2026년 여름 극장에서 이렇게 다시 살아 돌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 '오디세이'는 단순한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오래된 기억과 현재가 겹치는 이상한 감각을 선사한 영화였습니다.
20년 전 전집과 2026년 극장 사이
제가 처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접한 건 아들을 통해서였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하루에 한 권씩 전집을 완독하면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막상 아이가 읽기 시작하자 저도 덩달아 따라 읽게 됐습니다. SF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 방대한 세계관이 낯설지 않았거든요.
일반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는 어린이용 교양 독서로만 여기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고 봅니다. 처음 읽으면 신들의 이름조차 헷갈려서 내용 자체를 따라가기가 벅찹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천천히 읽으면서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그 순간부터 책이 전혀 다르게 읽힙니다. 상상력이 폭발하면서 이야기가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랄까요.
그때 제가 의외라고 느꼈던 건 신들의 성격이었습니다. 하나님이나 부처님처럼 자비로운 존재를 기대했는데,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질투하고 복수하고 인간보다 더 감정적입니다. 그 '인간적인 신'이라는 설정이 오히려 이야기를 더 생생하게 만든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호메로스(Homeros)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바로 그 감정 덩어리들이 충돌하는 이야기입니다.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의 명예와 죽음을 담고, '오디세이아'는 전쟁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한 인간의 20년을 담습니다.
놀란 감독이 이 귀환 서사를 선택한 게 우연은 아닐 겁니다. 세상의 이야기 구조는 결국 두 가지, '대립과 영광의 전쟁담'이 아니면 '낯선 세계를 헤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는 후자를 골랐습니다.
놀란이 꺼낸 카드: 귀환서사를 영화로 옮기는 법
영화를 보기 전에 20년 전 기억이 너무 흐릿해서, 요점만 짧게 정리해 읽고 갔습니다. 이게 결정적이었습니다. 오디세우스(Odysseus), 페넬로페(Penelope), 텔레마코스(Telemachos)의 세 갈래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는 구조라 사전 지식 없이 보면 흐름을 놓치기 쉽거든요. 일반적으로 신화 기반 영화는 그냥 봐도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제 경험상 이 영화만큼은 아닙니다.
제작 면에서도 이 영화는 기록을 여럿 세웠습니다. 제작비 2억 5천만 달러(약 3,500억 원)는 놀란 필모그래피 사상 최고액이고, 영화 역사상 최초로 작품 전체를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IMAX Film Camera)로 촬영했습니다.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란 일반 35mm 필름의 약 10배에 달하는 해상도를 가진 초대형 포맷 카메라를 말합니다. 91일간 촬영에 사용된 필름이 210만 피트, 길이로 환산하면 640km에 달합니다. 그 필름이 극장 스크린에서 뿜어내는 밀도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개봉 첫 주말 성적도 그 완성도를 뒷받침합니다. 북미에서만 1억 2,450만 달러, 전 세계 합산으로는 2억 6,410만 달러(약 3,700억 원)를 기록했습니다. 놀란 감독 작품이 흥행에서 검증된 건 '다크 나이트'나 '인터스텔라' 때 부 터지만, 이번만큼은 서사시(Epic)라는 장르 특성상 관객의 사전 지식수준이 흥행에 변수가 될 거라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서사시란 신화적 영웅의 장대한 여정을 담은 장편 이야기 형식으로, 단순한 액션물과는 구조 자체가 다릅니다.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이 특히 흥미롭습니다. 아킬레우스(Achilles)처럼 힘으로 돌파하는 영웅이 아니라, 지혜와 속임수,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넘기는 캐릭터입니다. 키클롭스(Kyklops) 폴리페모스를 상대할 때 자신의 이름을 '우티스(Outis)', 즉 "아무도 아니다"라고 속인 뒤 술에 취하게 해 눈을 찌르는 장면은 그 대표적 예입니다. 세이렌(Siren)의 노래를 듣기 위해 자신만 돛대에 묶이게 하고 부하들의 귀를 막은 장면도 있습니다. 세이렌이란 아름다운 노래로 지나가는 선원들을 죽음으로 유혹하는 반인반조의 존재입니다. 이 영리함이 오디세우스를 현대적으로도 공감할 수 있는 인물로 만들어줍니다.
하지만 그는 완전한 영웅이 아닙니다. 폴리페모스를 탈출한 뒤 흥분해서 자신의 진짜 이름을 소리쳐 포세이돈의 분노를 산 것도, 부하들에게 위험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것도 오디세우스입니다. 그 오만함이 모든 동료를 잃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크세니아(Xenia)라는 개념도 이 맥락에서 중요합니다. 크세니아란 고대 그리스의 손님 환대 관습으로, 낯선 이를 극진히 대접하는 일종의 도덕률입니다. 오디세우스가 폴리페모스의 동굴에 들어가며 이 관습을 기대했다는 설정은, 당시 그리스인의 세계관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놀란이 이 복잡한 인물을 어떻게 스크린에 구현했는지, 영화 속 오디세우스의 어떤 결정 장면에서 그 균열이 가장 잘 드러나는지, 그건 직접 보셔야 압니다. 미리 말하면 재미없으니까요.
놀란 작품에서 아이맥스 포맷이 서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IMAX 공식 기술 페이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화면이 크다는 차원이 아니라, 촬영 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기술임을 알면 영화를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26살 아들과 나란히 앉아 본 부자관람의 의미
이번 영화 관람에서 제가 가장 좋았던 건 영화 자체보다 옆자리였습니다. 그 전집을 다 읽은 아이가 이제 스물여섯이 돼서, 20년 만에 같은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함께 봤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서 "폴리페모스 나왔어?" 하고 물었더니 "희미하게 기억난다"고 하더군요. 그 대화 자체가 저한테는 이미 감동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러 가기 전, 이 작품을 제대로 즐기려면 최소한 아래 네 가지 맥락을 알고 가는 게 좋습니다.
- 트로이 전쟁의 발단: 헬레네(Helena)의 납치와 틴다레오스의 맹세(Oath of Tyndareus). 그리스 영웅들이 헬레네의 남편을 지키기로 서약한 것이 전쟁의 씨앗이 됩니다.
- 트로이 목마(Trojan Horse): 오디세우스의 지략으로 10년 전쟁을 하룻밤에 끝낸 작전. 이 장면이 영화에서 어떻게 시각화됐는지가 관전 포인트입니다.
- 포세이돈(Poseidon)의 저주: 오디세우스가 폴리페모스를 눈 멀게 한 대가로 귀환 내내 고난을 당하는 구조적 이유입니다.
- 이타카(Ithaca)의 세 축: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아들 텔레마코스, 수의를 낮에 짜고 밤에 풀며 구혼자들을 버티는 페넬로페, 그리고 귀환 중인 오디세우스. 이 세 이야기가 어떻게 합쳐지는지가 후반부의 핵심입니다.
호메로스 서사시의 학술적 배경이 궁금한 분이라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오디세이아 항목도 참고하시면 도움이 됩니다. 원전의 구조와 문학사적 의미를 간결하게 정리해 놓은 자료입니다.
영화에서 제가 특히 인상 깊었던 건 페넬로페의 서사였습니다. 수의 짜기 작전, 즉 낮에 실을 짜고 밤에 몰래 풀어서 3년간 재혼을 미룬 이 여성의 지략은, 어떤 면에서는 오디세우스보다 더 집요합니다. 전쟁터의 영웅담이 아니라 궁전 안에서 혼자 왕국을 지켜낸 여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오디세이아'는 생각보다 훨씬 입체적 이면서 우리의 삶 속도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아르케티프(Archetype)라는 개념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아르케티프란 수많은 이야기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원형적 인물이나 구조를 뜻합니다. 오디세우스는 '귀환하는 영웅'의 원형이고, 페넬로페는 '기다리는 자'의 원형이지만, 그 기다림이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는 게 이 신화의 핵심입니다